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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에 위치한 인사동은 현대적인 갤러리와 전통찻집, 한국 최대의 골동품 및 미술품이 있는 거리입니다.
6.25 전쟁이 끝난 후 이 지역은 한국의 예술적 삶과 카페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1960년대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 사이에서 메리의 골목이라 불리는 인기 관광지가 되었으며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얻었습니다. 최근 몇 년 동안 인사동 뒷골목은 카페, 정원 레스토랑, 전통 펜션 스타일의 숙박 시설로 고급화되었습니다.
인사동은 전통,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며 그 과장에서 다량의 전통 이미지가 생산되고 소비되게 되었습니다.
인사동의 역사를 알아보며 왜 전통거리가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서점의 거리
‘인사동’이 인사동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시기는 일제 강점기인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의 일환으로 탄생된 인사동은 명칭에서부터 일제의 소산이자 근대의 산물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1914년 4월 1일, 부제 실시에 따라, 이전 중부 관인 방의 대사동, 원동의 각 일부와 견평방의 이문동, 향정동, 수전동, 승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관인방과 대사동의 이름을 따서 인사동입니다.
이렇게 인사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되는 시기를 전후로 해서 ‘인사동’이 처음 갖게 된 이미지가 바로 ‘서점가’입니다.
지금은 ‘인사동’에 서적을 취급 하는 곳은 통문관을 비롯하여 몇 군데 남지 않게 되었지만 1900년을 전 후부터 입점하기 시작하여 1920년대에는 인사동이 서점가의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개화기 교과서를 보면1900년을 전후로 하여 서울 남대문 근처, 종로통, 안국동 근처, 적선동 근처 등에 출판사와 서점 등이 꽤 큰 규모로 자리 잡고 있었고, 1920년 전후까지는 옛날 책과 개화기 교과서, 딱지본 등을 주로 매매하였습니다.
특히 근대식 학교의 설립에 따른 일본서적의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큰 거리와 학교 앞에 서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지금의 인사동 거리 또한 주위에 많은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몇몇 서점이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1920년에서 해방될 때까지는 종로통과 충무로 일대, 인사동 일대에 신간 서점과 고서점이 대부분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인사동의 ‘서점의 거리’는 6.25전쟁 이전까지 주로 형성되었는데, 이 당시에‘인사동’에 있었던 서점은 동광당 서점, 삼중당, 통문관, 일성당 서점, 일심당, 문우당, 연구 서림, 문예 서림, 삼성당, 동양당, 금문당, 한남서림 등이 있었습니다.
이중 한남서림은 한적을 전문으로 취급하면서 일제하에서도 인사동을 대표하던서점 겸 출판사였습니다.
인사동의 ‘서점의 거리’는 6.25 이후 골동상들이 점차 ‘인사동’일대의 상점들을 차지하게 되고, 고서적에 대한 수요도 줄게 되면서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탄생한 인사동과 시작을 같이한 인사동의 서점들은 진귀한 고서와 근대의 사상과 이념이 담긴 신간서를 모두 접할 수 있는 장소로 1950년대까지 사랑받은 근대적 공간이었습니다.
골동품의 거리
인사동의 ‘골동품의 거리’의 시작은 크게 두 시기로 나눠서 기술되곤 하는데, 첫 번째는 1920년대이며, 두 번째는 6.25전쟁 이후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고서점의 등장과 그 맥락을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고, 후자의 경우는 서점과 구별되는 몇몇 골동품상이 일제 강점기 때 입점해 있다가 6.25 전쟁 이후 명동과 충무로에 입지 해 있던 골동품상들이 땅값 상승 등의 이유로 ‘인사동’으로 많이 옮겨 오게 되면서 ‘골동품의 거리’가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 패망에 준비 없이 쫓겨나기 시작한 일본인들이 우리의 골동품을 대량으로 거리에 내다 팔게 되었고, 6.25 전쟁 후에는 형편이 어려워진 안국동 등 인근의 주민들도 골동품을 내다 팔기 시작한 것이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자리 잡게 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재도 ‘골동품의 거리’라는 인사동의 이미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문화․예술의 거리 현재 인사동의 이미지나 정체성을 표현할 때 ‘전통’이외에 ‘문화’나 ‘예술’이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1970년도부터 등장한 화랑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1970년 한국 화랑계의 대부라 불리는 박명자의 현대 화랑이 현대미술을 다루는 전문 화랑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인사동 일대의 화랑이 입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74년 문헌 화랑, 1976년에 경미 화랑과 박주환의 동산방 화랑이 개관하였으며, 1977년에 김창실의 선화랑, 그리고 1983년에 이호재의 가나화랑이 개점하면서 명실상부한 서울의 화랑가로서 그 면모를 다져나갔습니다.
당시 인사동에 화랑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었던 이유는 인사동이 기존에 고미술품을 취급하던 곳으로 근대 미술품도 같이 취급하면 동반상승효과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 민화가 유행한 시대적 상황도 미술계에서 고미술을 주목하게 하였으며, 그 결과 자연스럽게 인사동으로 시선이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명 화가들이 인사동일대에서 작업을 한 것도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입니다.
미술품을 취급하는 화랑이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는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훗날 인사동이 전통문화의 거리로 자리매김될 때 ‘문화’의 개념의 한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인사동은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에서 전통의 거리로 잘 알려져있습니다.
전통의 거리가 되기까지의 배경에 대해 알아보니 역사와 현대가 혼합된 분위기로 민족의 문화사를 진정으로 대변하는 서울의 독특한 지역임에 틀림없습니다.
※ 참고문헌 :전통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 서울시 종구로 ‘인사동’의 사례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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